신정모(申正模 ; 1691~1742)의 자는 경해(景楷), 호는 이치재(二恥齋), 본관은 아주(鵝洲)이다. 아버지는 덕일(德溢) 義城사람이며, 어머니는 선성이씨(宣城李氏)로 성구(星耉)의 딸이다. 1719년 進士試에 合格하고 文科에 壯元으로 及第하였다. 藝文館副正學에 任用되어 承文院으로 옮겨지고 1725년에 持平, 正言을 거쳐 司饔院主簿에 除授되었으나 赴任하지 않았다. 1726년 說書에 추천되었기에 赴任했다가 곧 辭退하였고 이듬해 江原都事, 兵曹正郞 등에 除授되었으나 모두 赴任하지 않았다. 居昌縣監의 除授를 받아서는 奉親의 편의를 도모해서 어머니를 모시고 赴任하였다. 1728년 戊申亂 때 官을 離脫한 罪로 軍威에 定配되었는데 特命으로 釋放되었다. 繡衣 李?이 戊申事를 誣告하여 湖南興梁으로 流配되었는데, 湖南學者들이 배우러 오는 사람이 많았다. 선생은 忠孝가 모두 缺하였다는 뜻으로 二恥齋라 自號하였으며 錦山에 移配되었다가 忠州로 移配되어 1742년 所에서 病死하였다.
二耻齋申公行狀
申正模의 행장이다. 공의 자는 景楷, 호는 二耻齋, 관향은 鵝洲이다. 1691년(숙종 17)에 안동 풍산에서 태어났다. 1719년(숙종 45)에 대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급제한 다음 해에 승문원 부정자 벼슬에서 휴가를 얻어 귀성한 후 벼슬이 내려도 부임하지 않다가 1727년(영조 3)에거창부사에 부임하였다. 다음 해 3월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는데,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았다고 하여 유배되었다가 용서되었다. 그 후다시 그 일로 유배되어 1742년(영조 18)에 유배지에 돌아가시니 향년 52세이다.
이치재집(二恥齋集)
유물명
이치재집(二恥齋集)
유물형태
책판
기탁자
크기
『이치재집(二恥齋集)』은 신정모(申正模 ;1691~1742)의 시문집이다. 신정모의 자는 경해(景楷), 호는 이치재(二恥齋), 본관은 아주(鵝洲)이다. 신덕일(申德溢)의 아들이며 의성(義城)사람이다. 1719년 문과에 급제한 후 예문관(藝文館), 승문원(承文院) 등을거쳤다. 1726년 설서(說書)에 추천되었으나 곧 사퇴하였다. 이후 거창현감(居昌縣監)을 제수받아 어머니를 모셨는데, 무신사(戊申事)를 무고(誣告)하여 호남흥량(湖南興梁)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호남학자들이 배우러 오는 사람이 많았다. 선생은 충효(忠孝)가모두 결하였다는 뜻으로 이치재(二恥齋)라 했으며 유배지에서병사했다